기고/ 양(量)과 질(質)
기고/ 양(量)과 질(質)
  • 서정규 내부통제연구소 대표
  • 승인 2023.11.07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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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규 내부통제연구소 대표
서정규
서정규

[시정일보] 양은 수량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질은 물질에 적용하면 사물의 근본이 되는 성질을 나타낸다. 이를 사람에 적용하면 사람 됨됨이의 바탕을 표현하는 말이 된다. 양을 사람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인구가 되고, 그 인구는 사람의 수를 나타낸다.

사람이 한평생 이루어낸 양을 살펴본다. 성품이 좋으면 인격자라 부른다. 학식이 높으며 말이나 행동거지에 나타나는 높은 품격을 말한다. 재산이 많으면 재력가라고 한다. 권력이 높으면 권력자 또는 세력가라고 한다.

양에 나타난 사람의 품격은 남보다 앞서야 한다. 양적으로 성공하면서 품격을 갖추면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Nobility obliges)란 프랑스어로 '귀족은 의무를 갖는다'라는 의미이다. 이 의미는 '부(富)와 권력(權力) 및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해야 한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사회 지도층이 새겨서 실천해야 할 의무를 말한다.

그 어원(語源)은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전쟁 중 한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에 있다. 1347년 프랑스 '칼레'시는 영국군에게 포위당했다. 프랑스군은 치열하게 싸웠지만, 더 이상 원병을 기대할 수 없어서 항복하게 되었다. 칼레시는 항복 사절단을 보내,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 자비를 구했다.

그러나 그 점령자는 칼레 시민의 생명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누군가 그동안 반항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그 책임 조건은 그 도시의 대표 6명이 교수형(絞首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칼레 시민들을 일대 혼란에 처했으나, 선뜻 나서서 자기가 대표가 되겠다는 자가 없었다.

모두가 머뭇거리는 상황에서 그 도시의 가장 큰 부자인 '오스타슈 드 생피에르'씨가 교수형 받기를 자원했다. 그러자 시장, 상인, 법률가 등의 귀족들이 처형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들은 다음날 교수형을 받기 위하여 칼레 도심의 교수대에 모였다. 그런 와중에 임신한 영국 국왕의 왕비가 그들을 살려 주라고 간청하였다.

영국 왕은 죽음을 자초했던 시민 여섯 명의 희생정신에 감복하여 살려 주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역사가에 의하여 기록되면서, 높은 신분에 대한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되었다.

그 후 유럽에서는 전쟁이 나면 귀족의 자녀부터 자원하여, 군인으로 제일 앞장서서 용감하게 싸우는 전통을 수립하게 되었다. 미국의 재력가는 자기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사례가 많다. 유명한 ICT 재력가 빌 게이츠는 자기 재산의 50%를 기부하였다.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재력가 부모가 죽으면 자식들이 그 부모 재산을 두고 서로 많이 갖겠다고 다투면서 원수가 되는 사례가 수두룩하다.

유일한 박사는 독립운동가이시면서 유한양행 창업주이시다. 1895년 1월 15일 평안도 평영부에서 태어나, 대한제국 시기 유년기에 미국 유학을 떠나 자립하면서 미시간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식품 사업가가 되었으며, 귀국한 후 제약업을 선택하고 1926년 서울에서 유한양행을 설립하여 직접 차를 몰고 홍보와 보급에 나서는 등 식민지 조선의 전국 각처에 의약품과 생활용품 등을 공급하는 데 헌신했다

우리나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적인 분이시다. 1970년 돌아가셨을 때 不肖는 유한양행 장학생으로서 고려대 학생 대표로 장례식에 참석했었다. 그 장례식에서 들은 유언장 얘기는 참으로 놀라웠다.

외아들에게는 이미 사업 자금을 주었으므로(사업이 잘 안되었다고 들었다) 한 푼의 상속도 없었다. 학생인 어린 손녀에게는 대학 졸업 시까지 학자금 1만 달러만 준다. 나머지 전 재산은 전액 사회에 환원한다는 것이었다.

유일한 박사님은 미국 유학으로 박사가 되셨다. 미국에서 콩나물과 숙주 사업을 하셨다고 한다. 어느 날 콩나물 배달 손수레와 자동차의 충돌 사고가 났었다.

미국 기자의 눈에는 교통사고보다도, 새하얗게 대로 바닥에 흩어진 신기한 동양 야채에 더 관심이 갔던 모양이었다. 다음날 교통사고 기사의 사진은 콩나물의 새하얀 자퇴였다고 했었다. 그 당시는 주간 조선이 발간 중이었다. 그 주간 조선에서 유일한 박사와 국내 모 재벌의 창업주와 비교한 기사를 실었다. 그날 그 재벌회사의 전 조직원이 주간 조선을 몽땅 사들였었다.

그 당시 학생이었던 손녀 유일링 씨가 오늘 인터넷 조선일보에 인터뷰한 기사가 떴다. 그 기사의 제목부터 보통이 아니다. 기업은 나라의 것이라던 할아버지가 준 최고의 선물? 내가 나로 살게 한 자유·할아버지가 진실로 바란 것은 대한민국이 자유를 되찾는 것.

유일링 씨와 그분의 가족들은 유산 1만 달러에 대하여 그렇게나 많이? 하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그 할아버지의 숭고한 정신은 그분의 손녀에게로 흘러넘침을 본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어디로 숨고, 한탕으로 동포의 피눈물을 짜내 먹는 유력자의 분탕질만 난분분할까? 내로남불, 철판 얼굴, 증거 조작, 아니라고 우기기 그리고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 고쳐 매기가 기승을 부린다. 종로 거리에서 촛불을 켜고 유력자들이 마시고 없어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찾아 헤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