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광장/ ‘양간다리’ 5일 장날
인문학광장/ ‘양간다리’ 5일 장날
  • 임 용 담 前경기도안산교육지원청 교육장, 수필가
  • 승인 2023.11.14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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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용 담
임 용 담

[시정일보] 어린 시절 장에 가는 날은 가기 며칠 전부터 어떤 것들을 가지고 가서 팔아야 할까 생각하고 그 물건들을 챙기느라 바쁘게 움직인다. 다음 날이면 어머니는 아침 일찍 닭을 보자기에 싸서이고, 거기에 달걀 싼 꾸러미까지 머리에 인 모습이 옛날의 장에 가는 모습이었다. 어머니 머리 위에 머리만 내놓은 닭들은 자기들이 어디로 가는지 몰라 눈알을 뛰룩거린다.

시골에서는 돈이 없으니 집에서 키운 닭, 짚으로 만든 달걀 꾸러미, 각종 곡식, 밭에서 나는 고추, 감자, 호박 등 돈이 될 만한 것을 수확하여, 머리에 이고 지고 가파른 고개를 넘어가면 편안한 신작로 길이 나온다.

신작로 길을 걸어 10여 리나 떨어진 면 소재지의 ‘양간다리’라는 장이 서는 곳이 나온다. 장이 서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장사꾼들이 머리에 이고 온 곡식이며 채소를 낚아채 간다. 어머니와 나는 물건을 가지고 가는 장사꾼의 뒤를 따라가 돈으로 환전한다. 그 돈으로 생활에 필요한 물건, 농기구, 자식들에게 입힐 옷, 고무신 등을 산다.

시골 장터의 모습은 늘 시끌벅적하다. 자기 가게 물건이 제일 싸다고 물건을 파는 아줌마 아저씨의 고함이 귀청을 울린다. 또 가게의 모습은 물건 값을 깎기 위한 실랑이 소리, 술 취한 주정뱅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왁자지껄하다. 그 와중에 한 귀퉁이에는 화투판이 펼쳐지고, 장기판엔 훈수꾼들이 둘러싸고 있다.

물건을 사는 모습도 장관이다. 주인과 어머니가 서로 실랑이 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머니는 물건 값을 조금이라도 까기 위해 쥐었다 놓았다 한다. 그러면 주인은 몇 푼 깎아준다고 말을 한다. 계산하고 물건을 가지고 나오면 되는데 또다시 물건을 놓고 나오려고 한다.

주인은 다시 어머니의 손을 잡고 흥정을 한다. 결국, 처음에 불렀던 가격의 반 정도의 가격에 물건 값을 치르고 나온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반 가격으로 물건을 샀다는 승리의 미소가 피어오른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그 모습이 스쳐 간다.

장날은 물건이 거래되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소식을 전해주고 연락망이 작동되는 통신의 역할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 연락망과 연결하기 위해 시골장이 서는 날이면 비록 사고팔 물건이 없다 하더라도 시골 장으로 모여들어 오랜만에 만난 이웃 동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멀리 떨어져 사는 친척들을 만나 소식을 전하고 듣곤 했다.

관혼상제의 소식은 물론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상사는 소식과 특히 정부나 중앙정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쟁과 암투에 대해 촌민들로서는 접하기 힘든 비밀스러운 정보 역시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한 정보망을 매개로 전파됐다. 그 이야기가 사실인가 거짓인가도 모르면서 거기에 자기의 사적인 의견을 붙여 또 전파해 나간다.

장날에 가장 요란한 곳은 단연 주막집이다. 시골 장을 중심으로 지방에 산재하고 있던 대중적인 식당인 주막은 마당에 펼쳐놓은 평상자리나 마루에 걸터앉아 술을 마시는 곳이다. 술안주는 김치나 나물, 때로는 생선 거리 등이었고, 술을 다 마시면 술값은 마시던 자리에 놓고 간다. 사람들의 교류를 촉진하고 친선을 도모하는 데에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큰 소리가 나며 결국은 술에 취한 사람들의 싸움판이 되기 일쑤였다.

전통적으로 시장은 장꾼과 구경꾼을 위한 종합적인 예술의 장이었다. 조선 후기의 사회에서는 상거래가 이루어지는 장마당 한쪽에서 판소리, 씨름, 줄다리기, 윷놀이, 남사당패 놀이 등이 펼쳐지는 한편 각설이와 풍각쟁이는 장터를 휘젓고 다니며 시장의 분위기를 즐겁게 달구었다. 장에 나온 아이들은 온종일 뒤 따라다니며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운수 좋게 어머니를 따라 장에 가는 날은 횡재를 잡은 날이다. 오일장에 매번 오는 것은 아니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 장이 서는 곳 앞 넓은 터에 약장수가 자리하는 날에는 해가 기울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하고 구경을 한다.

속칭 ‘동동구루무’ 그리고 구수한 입담에 차력사들의 아슬아슬한 차력술과 가끔 항아리 위에 올라 가냘픈 소녀가 항아리도 굴리고 노래도 한다. 아직 채 구경이 끝나지 않았는데 어머니께서 가자고 할 때는 아쉬움에 눈물을 훔치며 발길을 돌리곤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오는 길에 몰래 사놓았던 눈깔사탕으로 달래 준다. 그 맛은 지금도 세월의 추억 속에 잠길 때가 있다. 신발 한 켤레 고르다 보면 내 손을 잡고 물건 값 흥정하던 어머니가 생각나는 그곳이 장터이다.

오래된 오두막집의 국숫집에서 여러 명이 비집고 앉을 수 있는 나무판자로 된 그 긴 의자가 있었다. 의자에 같이 앉으면 누구나 다 식구나 친척 같았던 얼굴들, 수많은 사람의 출출한 배를 따뜻하게 채워 주었던 국수 삶는 솥단지에서 삶아져 나온 잔치국수 한 그릇과 막걸리 한 잔을 들이켜며 세상 사는 이야기에 푹 빠져든다. 소박한 밥상이지만 임금님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린 수라상이 부럽지 않다

뻥튀기 장사가 화통을 삶아 먹을 기세의 큰소리로 “귀 막으세요. 고막이 나갑니다.” 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펑’하는 소리가 온 장터를 울린다. 강냉이를 튀겨내면 머리 위엔 이불처럼 큰 보따리 짐을 이고, 한 손엔 조각조각 남은 천으로 기워 만든 바구니를 들고 한발 한발 성큼성큼 아주머니들이 걸어간다.

나이가 어릴 때라 날짜에 대한 개념이 없다. 어머니께 장날이 언제인가 자주 물어본다. 사흘 밤만 자면 돼, 또 자고 나면 묻고, 또 물어봤다. 어머니 따라 장에 가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꼬맹이가 따라가면 성가시니 옆집에 놀러 갔을 때 어머니는 혼자 몰래 장 보러 가신 날도 있다. 그러면 서운한 마음에 무서운 아버지 때문에 울지도 못하고 한나절 동안 시무룩하게 지내다 오매불망 어머니가 장보고 넘어오는 고갯길만 쳐다보았다.

멀리서 동네 장꾼들이 보이면 빛의 속도로 달려가서 나만 쏙 빼놓고 간 어머니가 원망스러워 있는 대로 티를 내며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러댔었다. 그러면 “아들 주려고 이거 사 왔지” 하고 알사탕을 내어놓는다. 그때의 알사탕 맛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정말 꿀맛이었다. 하루는 얼음과자(얼음과자)를 장에서 사서 보자기에 싸 왔는데 집에서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얼마나 먼 거리를 걸어왔는데 녹지 않고 그대로 있을 수 있었겠는가?

어른이 되어서도 장터는 나에게 정겨운 장소였다. 주로 시내에서만 근무하다 처음으로 경기도 포천에서 근무할 때다. 내가 자랐던 시골 장날과 같은 5일과 10일에 장이 선다. 그때의 일들이 생각이 나서일까 장날만 되면 꼭 퇴근길에 직원들과 장을 한 바퀴 돌면서 수다를 떨고 뜨끈한 곰국에 막걸리 한잔하면서 그때의 정감을 느끼곤 했다.

시골 장터는 치열한 상거래의 장소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정을 나누는 동네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런 시골장도 상설 대형할인점에 밀려 설 곳을 잃어가고 있다고 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