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광장/ 내 생애 최고의 선물
인문학광장/ 내 생애 최고의 선물
  • 임 영 희 전 서울두산초등학교 교장
  • 승인 2023.11.30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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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영 희 전 서울두산초등학교 교장
임 영 희
임 영 희

[시정일보] 어머니는 2007년 2월, 구정을 가족과 함께 지내기 위해 남편의 차로 서울로 올라오셨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명절에 우리 집에 오실 때마다 목포집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같이 살아야만 어머니도 우리 집에도 서로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서울에 살면 일찍 죽는다더라.” 하시고는 기어코 고향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서울 집에서 2개월을 지내시고 4월경 목포에 되돌아가시려다 평택에서 어지러워 다시 귀경하셨습니다. 이유는 어머니가 갑자기 차 안에서 어지러웠기 때문입니다.

그 후 어머니는 예전의 어머니가 아니었습니다. 이상행동을 자주 하셨습니다. 내가 출근하고 집에 없는 사이에 어머니는 집안일을 돕고 싶으셨나 봅니다. 어머니가 설거지하려고 안티푸라민 로션을 행주에 묻혀 그릇을 닦으셨습니다. 퇴근하여 보니 온 집안에 안티푸라민 냄새가 진하게 났습니다.

세탁하려다 럭스를 세탁기에 부어 모든 빨래가 망가지기도 했습니다. 쿠쿠 밥솥이 돌아가고 있는데 밥솥 문을 열어보셨습니다. 식사하려고 보니 쌀이 생으로 그대로 있는 일도 경험합니다. 어머니의 행동이 이상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건강하실 때 어머니의 쪽 머리는 참으로 고왔습니다. 두상이 잘 생기고 머리숱이 많고 검어서 쪽을 지어 옥비녀를 꽂으면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길고 흰머리를 풀어헤치고 나를 빤히 바라보고 계실 때 나는 처음 보는 어머니의 모습에 매우 놀랐습니다.

전혀 생소한 사람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가 갑자기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이제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커트해 드리자고. 그리고 미장원에 모시고 가서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커트해 드렸습니다.

학교에 출근하여 부장 회의 때 이런저런 어머니의 일을 얘기했더니 답이 나왔습니다. 경험 있는 분들이 치매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름다웠던 어머니의 변화에 너무도 놀라 패닉 상태에 빠졌습니다.

목포 고향에 같이 살 때 어머니는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하셨습니다. 며느리를 돕기 위해 선창에 나가 배에서 버리는 생선과 새우, 시래기도 주워 오셨습니다. 이런 재료로 어머니가 직접 담근 된장을 넣어 국을 끓이시면 먹어본 적이 없는 된장국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담근 고추장과 간장 맛도 잊을 수 없습니다.

행여 며느리 손에 시장 봐온 음식 재료가 보일라치면 “내가 알아서 반찬은 준비할 테니 돈은 아껴라.” 시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우리 가족은 평소에도 어머니가 담근 김치를 먹었습니다. 저는 그 맛을 흉내 낼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겨울 김장도 다 손수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전 어머니가 아닙니다.

남편과 어머니 건강 상태를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 아무래도 어머니가 치매 같다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바로 부정했습니다. 어떻게 우리 어머니가 치매란 말인가! 남편과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모시고 중앙대 신경과 기백석 교수님을 찾았습니다. MRI를 찍어봐야 안다는 것입니다. 두 번 MRI를 찍는 시도는 실패였습니다. 어머니가 MRI를 찍는 곳에 들어갔다가 바로 뛰어내렸습니다. 몇 달 후 손과 말을 묶은 뒤 MRI를 찍었습니다.

그리고 진단이 치매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뇌의 삼 분의 일이 채워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고혈압도 발견되었습니다. 모두가 내 잘못인 것 같았습니다. 같이 살았더라면 치료도 해드리고 식사도 잘 챙겨드려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2000년도에 어머니를 목포에 두고 서울로 우리 가족만 올라왔습니다. 그 일이 몹시 후회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되돌리기에는 늦었습니다. 혼자 계시는 8년 사이에 어머니의 병은 깊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진단받은 2007년 10월에는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생기기 전이었습니다. 거의 1년을 집에서 요양해 드리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진단 후부터 바로 약을 타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며느리인 나도 아픈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시기에 어머니는 외동딸이 사는 고향 하의도에 가시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2008년 1월 15일 시누이께 연락드렸더니 외손자를 보내서 어머니를 모셔갔습니다. 하의도에서 시누이가 4개월을 돌봤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4개월 만에 체중이 많이 빠지고 약 한 봉지도 드시지 않은 채 서울로 되돌아오셨습니다. 시누이가 늘 바다 일과 농사에 바빠 혼자 계실 때가 많았을 것입니다.

무인도를 가진 시누이는 바다에 나가 자연산 미역도 따고 다시마도 따야 했기 때문에 바빴을 것입니다. 밭에 고추도 심고 시금치도 심어서 겨울 농사를 짓느라 많이 바빴을 것입니다. 시누이의 형편을 이해합니다. 어머니 혼자는 식사와 약 먹는 것을 잊었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어머니의 체중이 45kg에서 10kg 감소하여 35kg 이 되어 돌아오셨습니다. 시누이는 어머니가 치매가 아니라고 내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식사와 약도 챙기지 않은 것 같습니다. 2008년 5월 17일 시누이댁에 가신 지 4개월 만에 하의도에서 서울로 다시 외손자가 모셔 왔습니다. 시누이댁에 보내드린 것은 제 실수였습니다. 그 후 2개월을 집에서 남편이 어머니를 돌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동네 바로 집 옆 성산 교회에서 희망의 소식이 들렸습니다. 나는 2008년 7월 1일부터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작된다는 것을 뉴스를 통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네에서 가장 먼저 그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간 가정의 몫으로 남겨져 있던 치매, 중풍 등 노인에 대한 요양 문제가 이제 국가와 사회가 공동으로 사회연대원리에 의해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바로 집 옆 성산 교회에서 장기 요양원을 허가받아 장기 요양 등급을 받은 분들을 돌봐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당시 어머니는 3등급을 받아 2008년 8월 초에 입소하여 2009년 3월 9일까지 7개월 10일간 정말 잘 계셨습니다. 그런데 3월 10일 문제가 크게 발생했습니다. 어머니는 고관절이 골절되신 것입니다. 그 요양원은 지하에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아들이 오니 나가시겠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지하에서 올라오는 일이 얼마나 힘드셨을까! 다 올라오셔서 다리가 힘이 없어졌는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고 합니다. 고관절 골절은 83세이신 어머니에게 사망선고나 다름없는 큰일이었습니다. 그대로 누운 채 어머니는 병원으로 실려 가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고관절이 골절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나는 동작경희병원에 전화하여 구급차를 불렀습니다. 안승준 원장님은 정말 수술을 잘하시는 분이며 수술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수술 후 20일을 치료했습니다. 병원에서 처음 간병인이 어머니를 며칠 돌봤습니다. 그때 마침 남편이 연락했는지 시누이가 올라왔습니다. 어머니가 병원 계실 때 도와준 시누이가 고맙습니다.

동작경희병원에서 2009년 3월 31일 퇴원하여 찾아간 요양원은 금천구 시흥동 실버캐슬요양원이었습니다. 병원에 계실 때 잘 돌봐 주는 평이 좋은 곳을 여기저기 찾아보았습니다. 그래서 결정된 곳은 금천구 시흥동에 있었던 실버캐슬요양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병원 구급차로 실버캐슬요양원으로 모셨습니다. 실버캐슬요양원은 시흥나들목 큰 도로변에 있었고 건물 1층에는 국민은행이 있었습니다. 며느리 곁에 살다가 며느리 곁에서 죽고 싶다던 소원이 이루어지는 일이 생겼습니다.

요양원 입소 3년 6개월이 되는 2012년 9월에 제가 두 번째 교장 임지로 금천구 독산동 서울 두산초등학교에 발령받았습니다. 어머니의 소원을 하늘에서 들어주셨습니다.

저는 1년 3개월간 날마다 시간이 나면 어머니가 계신 실버캐슬요양원에 갈 수 있었습니다. 내 차로 5분 거리입니다. 서울 두산초등학교는 참으로 제게 모든 수고의 마지막에 받는 최고의 감동을 안겨준 학교입니다. 어머니를 날마다 돌볼 수 있다는 것, 참 감사했습니다.

어머니는 실버캐슬요양원에서 밝고 노래 잘하며 예쁜 할머니로 소문났습니다. 어머니는 늘 웃고 박자에 맞추어 노래하셨습니다. 평소에는 이런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양원에 들어가시면서 밝고 경쾌한 분으로 바뀌셨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DNA를 받으신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 들었던 아버지에 대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어머니의 친정은 신안군 하의면 대리입니다. 아버님의 존함은 김운식입니다. 어머니의 아버지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셨습니다. 그중에서도 판소리 실력이 뛰어나셨고, 춤도 능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소리를 좋아하셨기에 당시 하의도에서는 유일하게 어머니 댁에 축음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처음 유성기가 들어왔을 때는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작은 통 안에 들어가 노래를 할 수 있냐”며 놀라워했다고 합니다. 섬마을에 유성기가 들어왔다는 것, 그 속에서 소리가 튀어나왔다는 것은 당시로는 사건이었다고 합니다.

내가 매주 요양원을 방문할 때마다 어머니와 같이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 열차’ 등 어린이 찬양과 우리 민요 ‘노들강변’을 박자 치며 힘차게 잘 부르셨습니다. 어머니는 조용한 요양원의 활력소였습니다.

밝고 쾌활하신 어머니는 힘든 요양사님들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사랑도 듬뿍 받았습니다. 내가 요양원에 갈 때마다 요양사님들이 어머니는 정말 멋진 분이라고 어머니의 달란트를 전해줍니다. 평소에도 어머니는 칭찬과 유머를 잘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어머니는 평생 일하는 며느리를 위해 네 명의 손자 손녀들을 기르셨습니다. 일터에서 돌아오는 며느리를 기다리며 사는 것을 낙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우리가 살던 집은 목포과학 대학 정문 앞 언덕길을 한참 올라가야 합니다. 어머니는 며느리가 퇴근해 오는 시간에 대문 앞에 나와 학교 화단 가 바위 위에 앉아 며느리를 기다립니다.

항상 귀가 시간이 일정했던 며느리가 조금만 늦어져도"너 어디 들렸구나. 배고프겠구나~^^"시계도 없이 잘도 아신다 싶어"어떻게 아셨어요?"여쭈면"네가 오는 시간만 기다리다 늦어지면 나와 본다."며느리가 출근하고 퇴근하는 재미에 사신다던 어머니가 오늘따라 그립고 뵙고 싶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불러봅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그립습니다!”

어머니가 제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그 무엇으로도 갚을 길이 없습니다. 나는 성경 룻기에서 소망이 없던 이방인 며느리 노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선택함으로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된 일을 묵상하곤 합니다. 저 또한 어머니로 말미암아 모든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나의 모든 복은 어머니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며느리와 같이 살다가 며느리 곁에서 죽고 싶다”시던 어머니는 마지막 임종의 소원도 이루셨습니다. 실 버캐를 요양원에서 4년 8개월 13일을 돌봤습니다. 그 요양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어머니가 이상하시니, 빨리 오세요!” 전화를 받고 요양원으로 갔습니다.

마침 어머니는 긴 숨을 쉬고 계셨습니다. 남편께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습니다. 오직 며느리 혼자서 소천하시는 어머니를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긴 숨을 상당히 긴 시간을 쉬시고 난 후 눈을 감으셨습니다. 2013년 12월 14일! 영혼 떠난 어머니 얼굴은 평화가 감돌았습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천국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