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손호철 저, '한 스님' 박헌영의 아들 원경 대종사 이야기
서평/ 손호철 저, '한 스님' 박헌영의 아들 원경 대종사 이야기
  • 임춘식 논설위원
  • 승인 2023.12.08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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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정치학자가 기록한 어느 스님의 고난과 해원

 

손호철 교수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시정일보 임춘식 논설위원] 진보적 정치학자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쓴 ‘한 스님’은 원경(1941~2021)이라는 인물의 삶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상흔을 부조해 낸 평전이다. 혼외자, 빨갱이의 자식, 소년 빨치산, 유디티(UDT) 요원, 북파 공작원 교관, 탈영병, 무술 고수, 가명 14개 사용, 역사 관련 연구소 설립, 조계종 원로회의 부의장 등 다채로운 삶을 산 주인공인 원경 스님 이야기다.

그는 북한 정권 부수상과 남조선노동당(남로당) 부위원장을 지낸 박헌영(1900~1955)의 아들로 태어났다. 박헌영의 여러 자녀 중 남쪽에 살았던 유일한 혈육이다. 그는 부친의 잠적 등으로 사실상 고아 생활했고, 아홉 살 때 먼 친척인 한산 스님의 손에 이끌려 머리를 깎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미국 제국주의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사형당한 사실을 알고 복수를 다짐하며 유디티에 지원해 북파 공작원을 육성하는 특수 부대 교관으로 근무했다. 승려복을 벗은 친구들이 술자리에서 집단 폭행을 당하자 40대1로 싸움을 벌여 18명을 쓰러트리고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그의 다이내믹한 인생을 오랫동안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본 손 교수가 2022년 <프레시안>에 ‘원경 스님 그 파란만장한 삶’을 연재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스님과 모친 정순년이 생전에 한 구술, 현지답사, 인터뷰,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스님의 삶을 복원한 '휴먼드라마‘이다

어쨌든, 종교학자가 아니라 한국 정치를 공부하는 정치학자가 스님의 이야기를 쓴 이유는 그의 삶이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가장 응축해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저자의 잦아들지 않는 그리움은 책의 서문에 절실하게 배어있다. "원경 스님은 평소에 말했다. '산 자의 그리움은 족쇄와 같아서 살아 있는 사람이 내려놓지 않으면 망자는 떠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나도 그리움을 내려놓으려 한다. “말한다.

대종사(大倧師, 가장 높은 종교적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 주는 최고의 품계)에 조계종 삼인자인 원로회의 부의장, 혼외자, '빨갱이' 자식, 소년 빨치산, 특수 부대인 UDT 요원과 북파공작원 교관, 탈영병, (40대 1의 대결에서 18명을 때려눕힌) 무술의 고수, 국토건설단(박정희 집권 시절 강제노동수용소) 단원, 음독자살 기도. 서로 잘 어울리지 않는 매우 모순된 조합이다.

저자가 스님을 만난 것은 유학에서 귀국한 직후인 1980년대 말이니 30여 년이 흘렀다. 이후 스님으로부터 직접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스님의 여러 인터뷰를 읽었지만, 스님에 대한 글을 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연한 계기에 이 글을 쓰게 됐다고 고백한다. 스님의 행적을 따라 전국을 돌아다니며 현장을 보고 느꼈고 사진도 찍었다.

책에 나오는 사건과 행적은 이해를 돕기 위한 객관적인 상황에 관한 서술을 제외하고는 모두 스님과 어머니의 회상에 기초했다. 책 속의 대화들도 대부분 스님과 어머니의 회상에 의한 것이다. 다만 이를 사건 형식으로 풀어 썼고 일부 세부적인 상황은 여러 자료와 현지답사로 보충하고 일부 대화는 전체적 맥락을 고려할 때 당연히 있었을 대화를 재구성한 것이다.

스님은 살아가면서 병삼, 유동, 세원, 현준, 일우, 명초, 성진, 혜공, 혁, 원경 등 모두 14개의 이름을 사용했다. 이 자체가 그의 삶이 얼마나 기구했는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글에서는 기본적으로 그때그때 꼭 필요한 당시의 이름이 아니면 병삼과 원경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그의 삶이, 특히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이 일제 말과 해방정국, 한국전쟁 이후 5.16쿠데타 등 격변의 시대였던 만큼,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이해가 그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긴 설명이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에 대한 설명은 최소화하는 한편 괄호 안에 간단히 설명하는 형식을 취했다.

원경 스님은 젖도 못 뗀 핏덩이 시절에 어머니와 헤어졌다. 월북해 생을 마감한 아버지의 존재는 훗날에야 알았다. 그렇게 부모와 생이별해 남로당 비밀 아지트에서 고아처럼 지냈다. 한국전쟁이 터졌다. 먼 친척 손에 이끌려 아홉 살 어린 나이에 머리를 깎고 지리산으로 숨어들어 가 '얘기 빨치산' 생활했다.

북으로 간 아버지의 처형 소식을 나이 열일곱에 들었다. 스물이 넘어 처음 만난 어머니에게선 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이 원망스러워 음독했지만, 생이 질겼다. 낭인처럼 전국을 떠돌았고, 강제노역에 끌려가기도 했다. 어디를 가나 세상은 '빨갱이 자식'이란 돌을 던졌다. 온통 잿빛뿐인 '박헌영의 아들', 박병삼 생존기다.

원경 스님이 주지를 맡았던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동천리 무봉산 (舞鳳山)에 있는 만기사(萬奇寺)에 '해원탑'이 있다. 박헌영 추모탑인데, '원한을 푸는 탑'이라는 의미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라고 이를 갈던 박병삼 시절의 원한을 내려놓은 원경의 마음이 전해지는 탑이다.

남한에선 '빨갱이', 북한에선 '미제의 간첩'으로 내몰려 '남북한에서 모두 저주받은 자' 박헌영의 정당한 복권이 이뤄져야 역사의 해원도 가능하다. 손 교수가 쓴 <한 스님>은 박병삼, 즉 원경의 일대기로 한국 현대사를 파헤친 책이다. 마침 원경 스님의 입적 2주기 즈음에 도서 출판 이매진에서 출간됐다.

이 책은 원경 스님의 삶이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가장 응축해 보여주고 있으며, 실제로 빨치산을 이끈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 김삼룡·이주하 등 남로당 핵심 인물들, 흐릿하지만 한산 스님을 매개로 박헌영에 관해 남아있는 원경 스님의 어린 시절 기억을 촘촘하게 재현했다. 해방정국, 한국전쟁, 군사정권 등 세상의 격변 역시 시대적 배경을 넘어 원경의 일생 마디마디에 스며들어 있다.

특히 저자는 우리가 모르던 새로운 역사적 사실들을 알려주고,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역사적 사실들도 그 뒤에 숨겨진 참된 진실과 의미들을 보여주고 있다. 2022년에 발간한 <키워드 한국 현대사 기행 1, 2> 역시 발로 뛰며 현장성을 살리고 사실에 충실하면서도 단순히 역사적 사실에 매몰되지 않고 정치학자의 시각에서 그 의미를 다루었고 진보적 시각이되 글로벌하고 보편적 시각에서 서술했다. 정치학자 손호철, 그는 뿌리의 소리를 찾아 역사의 현장을 다룰 줄 아는 저술가임이 틀림없다.

정치학자인 손호철 교수는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선배를 잘못 만나 운동권이 됐고,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신군부가 저지른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미국으로 유학하러 가야 했다. 귀국한 뒤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사회과학대 학장과 대학원장을 지냈으며, 2018년 정년, 서강대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여전히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치고 있는 특출한 인물이다 (한남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