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광장 / 공정한 저울을 꿈꾸며
인문학 광장 / 공정한 저울을 꿈꾸며
  • 임 은 정 대구지방검찰청 부장검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23.12.26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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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은 정 대구지방검찰청 부장검사칼럼니스트
임 은 정 대구지방검찰청 부장검사
칼럼니스트

[시정일보] 몇 년 전 “십 원짜리 사건에 십 원어치의, 전 원 짜리 사전에 천원어치의 공력을 기울이라"고 훈시하던 검사장이 있었습니다.

가격을 매기는 기준이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회의만 길어질 듯해 말을 삼켰지요. 반부패부(구 특수부)는 한정 수량 명품 생산 부서, 형사부는 염가 제품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부서로 비유한 간부도 있었습니다.

한정 생산 명품에 불량률은 왜 그리 높은 거냐고, 형사부에 배당된 사건 당사자가 그 말에 수긍하겠느냐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역시 삼켰습니다. 현실 앞에선 덧없는 이상론에 불과하니까요.

의정부지검 근무 시절, 전처에게 집착하는 한 남자의 협박 사건을 배당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날 배당받은 42건의 사건 기록 중 비교적 얇은 사건이라 반갑게 펼쳤는데, 행간에서 느껴지는 증오가 얼마나 깊던지 바닥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험악한 말이 곧 행동으로 이어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에 피해자와 피의자에게 다급히 전화했는데,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제가 전화하던 그때 두 사람이 이미 사망했다는 걸 며칠 뒤 변사 기록에서 확인했지요. 피의자 사망으로 인해 '공소권 없음 으로 종결했습니다. 그 협박 사건이, 두 분의 생명이 십 원짜리일까요.

지속적인 직무 배제로 내부 고발자의 자존감을 무너뜨려 결국 제 발로 나가게 하는 방식으로 괴롭힌 사례들을 기사로 종종 접했는데, 검찰에서는 오히려 일을 더 주더군요. 짬이 나면 검사 게시판에 비판 글을 더 쓸 수 있으니 바쁘게 만들고, 일이 많아 실수가 잦아지면 벌점이 쌓일 테니 쫓아낼 명분으로 삼기에도 좋습니다.

검사 적격 심사가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에는 수레로 실려 오는 사건 기록들이 벌점으로 보여 어찌나 숨이 막히던지요. 이틀간 배당받은 사건 기록으로 캐비닛 5개가 꽉 차는, 속칭 '벌 배당'도 받아보았고, 수사 지휘 전담을 하며 매달 500건이 넘는 사건을 배당받기도 했습니다. 간부들의 감정 실린 보복 배당에 고생스러웠지요.

고달팠습니다. 기록에서 엿보이는 당사자들의 감정은 날이 시퍼렇게 서 있고, 사건 배경이 안개 너머 어슴푸레 보이는 정도라 수사해야 할 사항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주말을 반납하고 매일 야근해도 사건당 투입할 수 있는 시간이 현실적으로 많지 않으니 숨이 턱턱 막혔습니다. 간부들은 선택과 집중, 효율 등 미사여구로 신속한 처리를 독촉하곤 합니다만, 선택받지 못해 배려도 편찮은 사전이란 없기에 검사들은 기록 더미에서 늘 방황하게 됩니다.

십 원짜리 사건으로 잘못 분류된, 목숨 여럿 달린 사건에 검사의 헌신으로 백 원어치의 진실을 했다. 한들, 그 검사에게는 최선일지 몰라도 사전에 있어 최선의 수사라 할 수 없지요. 사건 당사자들에게 결코 만족스럽지 못한 수사 결과는 검사의 역량 부족 탓이기도 하지만, 대개 잘못된 검찰 내부 구조에 더 큰 원인이 있습니다.

무죄 구형으로 중징계를 받고 쉬던 2013년 2월, 동료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검사인사위원회에서, 징계 전력자는 근속기간에 예외를 두어 기간이 차지 않았더라도 전출시킬 수 있도록 했으니 유배지 창원지검으로 발령 나지 않겠느냐?는 위로였지요.

서울중앙지검에서 1년 만에 쫓겨나 정신없기도 했지만, 창원 시민에게 어찌나 미안하던지. 주권자로 양질의 사법 서비스를 동등하게 받을 권리가 있는데, 서울 시민과 달리 유배지 시민은 문제 검사에게 수사받아도 된다는 말이라, 주권자의 등급을 나누어 차별하는 어이없는 인사입니다.

"경찰 송치 사건이나 처리하는 형사부 검사로 남을 것인지, 변호사들에게 뒷돈 받고 소소한 사건들은 좀 봐주더라도 수사비로 거악을 척결하는 특수부 검사가 될 것인지, 잘 선택하라"고 초임 검사에게 조언하던 황당한 선배도 있었습니다. 그 선 배가 큰 거악으로 보여 무서웠지요. 덮고 싶으면 소소한 악으로 단정하여 눈감고, 죽이고 싶으면 거악으로 규정하여 파헤치는 막무가내 검찰의 전횡을 봐버린 듯 아찔했습니다.

십 원짜리 사건과 천 원짜리 사건, 멋지게 수사할 거악과 덮어도 되는 소소한 악, 양질의 사법 서비스를 받을 시민과 문제 검사에게 수사받아도 되는 시민. 그런 구별이 정당하고, 검찰의 잣대는 과연 공정할까요.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린 채 저울을 들고 있습니다. 권력과 재력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죄의 무게에 합당한 처벌을 하는 것이 정의니까요. 검찰의 저울이 고장 나 손가락질 대상이 된 지 오래지요. 눈금을 속여 온 검찰 등 권력자들이 수리공이 되어서야 고쳐질 리 있겠습니까.

검찰개혁의 동력은 오로지 주권자의 관심과 비판뿐입니다. 개혁 논의가 수면 위로 떠 오른 이때,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고쳐 공정한 저울로 거듭날 수 있도록 주권자의 관심과 비판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뒷이야기

2010년 김준규 검찰총장은 "검찰만큼 깨끗한 데를 찾기 어렵다"는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검찰이 검찰을 빼고 수사하는 수사 구조와 현실에서 발생한 착시 현상입니다. 2009년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가 사업가 친구에게 10억 대의 거액을 빌리고 함께 해외 골프 여행을 다녀온 사실이 청문회에서 드러나 스폰서 의혹으로 낙마하는 바람에, 어부지리로 검찰총장이 된 분이 할 말은 아니지요.

만약 건강만 경찰청장 후보자나 야당 국회의 원이었다면, 국민적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대검 중수부나 서울중앙지검 특수부가 신속하게 뇌물 수사에 착수하지 않았을까요? 천성관이 고위 검사라, 검찰이 실체를 궁금해하지도 않았고 궁금해서도 안 되어 의혹을 의혹으로 남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검사 상당수가 김준규 총장처럼 생각하는 게 현실입니다. 검사들이 유능하고 성실하게, 영혼을 갈아 넣는 헌신으로 엄청난 업무량을 감당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전의 제가 그랬듯이, 많은 검찰 구성원은 국민의 불신이 대개 오해라고 생각하고 억울해합니다. 왜 이렇게 괴리가 클까요?

제가 초임 검사였던 시절, 지독하게도 실적 관리에 열심인 동기가 있었습니다. 인지 수사 실적을 비롯하여 처리하지 못하고 남긴 미제 사건 수 등 통계 관리도 탁월했습니다. 이런저런 자랑 끝에 옛 여자 친구가 여권을 위조하여 공항으로 들어오다가 걸렸는데 부탁해서 사건을 없었다고 하더군요. 여성 편력을 자랑하는 것인지, 사건 무마 능력을 자랑하는 것인지 잘 구별되지 않았는데, 초임 같지 않은 노회함과 무개념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10여 년이 지나 후배들 앞에서 "지금까지 나라와 검찰을 위해 몸을 상해 가며 일했는데, 이제 건강을 돌보겠다"고 말하는 걸 우연히 들었지요. 그 검사는 좋은 인사 평가를 위해 열심히 일한 것을 정의에 대한 희생과 헌신으로 정신 승리한 사례입니다.

워낙 찍힌 검사이기도 하고, 시간이 많으면 검사 게시판에 글 쓸 것을 우려한 간부들의 특별한 배려로 속칭 벌 배당을 받곤 했습니다. 매일매일 수레에 실려 밀려드는 사건 기록에 치여 살았습니다. 민원인들의 독촉 전화가 빗발치니, 화장실 다녀오는 발걸음도 급해지지요.

연말 미제 사건 수는 소속 청 실적이기도 하니 벌 배당을 하면서도 통계 관리가 신경 쓰였던 간부는 "경찰이 수사를 잘했겠어? 적당히 무혐의로 털어버려"라고 사건을 신속하게 처리하라고 독려하기도 했습니다. 매일 야근은 기본이고, 공휴일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십 원짜리로 취급되는 사건을 몰 배당받아, 밤잠과 휴식 시간을 줄여 백 원 이상의 정성을 기울였다 한들 사건 당사자가 열심히 했다고 할까요? 대부분의 검사가 이 경우에 해당하는데, 검사들의 계산서 와 사건 당사자의 계산서가 전혀 다른 이유입니다.

검사들에게 사건 처리를 독려하는 모 간부에게 "검찰이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정신으로 버틴 지 수십 년인데, 도대체 형 사부 검사들에게 언제까지 희생과 헌신을 요구할 거냐? 인력이 부족하니 더는 검사들 업무를 수사관, 실무관에게 전가할 생각 말고, 이제 차장과 부장 들도 사건을 배당받아 직접 처리하라"고 건의하기도 했지요.

검사들 입장에서야 희생과 헌신이지만, 사건 당사자 입장에서는 사법 서비스 질 저하라, 알고 보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수뇌부가 수사 성과를 기대하는 사진은 반부패부에 배당하여 특정 사건에 수사 인력을 집중시키고, 수뇌부 시선을 빗겨 난 사건은 형사부에서 처리하는 숱한 사건 중 하나로 '땡처리 하고서야 죄에 상응하는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질까요?

반부패부 검사들 역시 수뇌부가 기대하는 수사 성과를 내야 하는 압박감에 시달리면, 표적 수사 내지는 몰아가기 수사로 치닫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그런 수사의 과정과 결과가 과연 공정할까요?

사건을 배당하고 지휘• 감독하는 간부의 저울이, 사건을 수사하고 처리하는 검사의 저울이 공명심에 오염되면, 죄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전관예우, 하명 수사 등도 저울의 눈금을 속이 는 여러 원인이지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배우자인 정경심 교수 사건이 제가 고발한 서울남부지검 성폭력 은폐 사건이나 부산지검 고소장 등 위조 은폐 사건보다 중할까요?

제 고발 사건들은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와 3부에서 매일 수레에 실려 배당되는 숱한 사건 기록 중 하나에 불과했고, 압수수색 한번 없이 결국 불기소 기록으로 수레에 실려 기록 창고로 갔습니다.

정경심 교수 사건 수사에는 반부패부 여러 검사실이 동원되어 광범위한 압수수색 등 강제수사와 참고인 조사가 이루어졌지요. 파야 할 사건과 파면 안 될 사건. 그 저울을 든 손이, 눈금을 보는 눈이 과연 공정할까요?

문재인 정부에서 공수처 도입 등 가시적인 성과가 없지는 않았지만, 사건 배당 제도 개선 등 법무검찰개혁위원회에서의 여러 권고가 검찰의 반대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검찰이 반대하는 부분이 검찰의 급소입니다. 검찰이 찬성하는 것만 바꾸고서 야 개혁이라 하겠습니까? 검찰의 저울이 고장 나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저울을 고치라고 계속 외쳐주십시오. 검찰이 고치는 시늉이라도 하고 있으면, 더는 고장 나지 않을 테고, 편향적이고 불공정한 검찰권 행사를 다소나마 주저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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