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광장 / 풀꾹새는 왜 우는가
인문학광장 / 풀꾹새는 왜 우는가
  • 임 재 근 전 합천부군수, 시인
  • 승인 2024.01.16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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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재 근 전 합천부군수, 시인
임 재 근 전 합천부군수, 시인
임 재 근 전 합천부군수, 시인

[시정일보] 내 유아기 밥알을 꼭꼭 씹어 나의 입에 밀어 넣어 주시며 잘 먹어야 쑥쑥 잘 큰 다 시며 무척 나를 사랑하셨던 할머니, 그 할머니의 산소가 있는 고향 함지 마을 도련 젖 산언저리에 대대로 경작해온 꽤 넓은 밭 두 때기가 있다.

당시는 농가에서 농우(農友)를 기르고 마을에 노동력이 많아 바지게로 져서 거름을 날아 보리 밀 그리고 콩이며 깨 고추와 고구마 등의 작물이 너무도 잘돼서 우리 마을에서는 문전옥답으로 평판 높았던 기름진 밭이었다.

그른데 지금에 와서는 경운기 진입이 안 되는 산비탈인 데다 산업화 바람에 마을 청년들이 도시로 다 떠나 노동력이 없다 보니 밭을 경작할 사람이 없어 1.000여 평이 더 되는 그 큰 밭이 쑥 잔디 쇠뜨기 아카시아 산딸기 돌밤나무 소나무 등이 저절로 자라 마치 산을 방불케 하고 있다.

간간이 할머니 산소에 성묘차 갈 때마다 황폐해진 그 묵정밭을 물끄러미 바라보노라면 대를 이어 물려주신 조상님께 죄스럽기 그지없고 마을 사람들 보기에도 무던히도 민망스러웠다. 하지만 수백리 밖 타향에 나와 직장에 매달려 살다 보니 어찌할 방도가 없어 그대로 내팽개쳐 둘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직장을 퇴직하고 보니 이제는 시간이 남아돈다. 우리 부부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십여 리 떨어진 읍내에 자그마한 아파트 한 칸을 구해 거처하면서 지난 수십 년 방치하고 있었던 조상 이 물려준 소중한 유산을 힘이 들더라도 손수 관리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 첫 사업으로 올봄 내내 그 밭에다 대붕 오십여 그루를 심고 여백의 땅에 거의 매일 같이 잡초를 뽑아내 밭을 일구는 작업을 계속한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밭이 너무 황폐해 있어 엄두조차 못 내겠더니 시작이 반이란 말처럼 일을 계속하다 보니 이제는 꽤 넓고 큰 땅을 일구어 가고 있다.

우리 내외가 난생처음으로 땀을 흘려 일군 이 값진 땅에다 콩도 심고 깨 고추 고구마 우엉도 심으면서 이것들이 잘 자라 수확을 하게 될 때 나누어 줄 두 아들과 시집간 두 딸 그리고 누님 두 분과 여동생 셋까지 온 가족들에게 나누어 줄 기쁨에 우리 부부는 서로 마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결혼한 지 삼십팔 년, 지금껏 내자와 이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한 적도 없거니와 이처럼 땀 흘리며 다정한 나날을 보낸 적은 일찍이 없었다.

노년에 접어들어 퇴직이 내게 준 선물로 알고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닌가 여기면서 오늘도 우리 부부는 밭에 나가 땀을 뻘뻘 흘린다. 내가 부지런히 삽질과 괭이질을 해 땅을 파놓으면 내자는 잡초와 나무뿌리들을 분주히 주워낸다.

삽과 괭이로 땅을 팔 때 나무뿌리나 돌이라도 닿으면 무진 애를 먹는다. 특히 이리저리 얽혀 있는 칡이나 새뜨기 아카시아의 뿌리를 파내기는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니다. 손발이 흙투성이가 되고 물집이 생기고 가시에 찔리기도 하지만 피부에 와 닿는 흙의 감촉이 너무도 보드랍고 향기로워 좋다.

일을 하다 보면 조금만 더 해야지 하는 욕심이 생겨 작열하는 태양이 내려 쪼이는 6월의 한낮에도 쉬지 않고 중노동을 하기가 다반사인데 비 오듯 땀이 나고 온몸이 새까맣게 그을린다.

그르다 지쳐 나무 그늘에 앉아 땀을 식히면서 새참을 먹는 그 맛은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다. 또 퍼지고 앉자 산천경개를 바라보며 나름 풍수지리를 논하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미풍 불어와 이마에 땀을 식히면 나뭇잎 사이로 들리는 산새들의 지저귐이 귀를 즐겁게 하고, 저 건너 숲속에서 울어대는 풀꾹새(뻐꾹새) 소리가 온산 골짝을 퍼져 흐른다. 풀꾹풀꾹 개개... 풀꾹풀꾹 개개... 자꾸만 울어대는 풀꾹새의 애끓는 절규가 산그늘이 내릴 무렵이면 이산 저산에서 너무도 구슬피 들린다. 하도 절통하고 애절한 한맻힌 울음이기에....

풀꾹새는 왜 저리도 슬피 울까 하고 허공을 향해 나 혼자 중얼중얼 그렸더니 내 옆에서 허리를 펴며 얼굴에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훔치던 내자가 내게 이렇게 일러 준다.

“옛날에 어머니를 일찍 여읜 소녀가 계모 밑에서 자랐는데, 그 계모는 이 소녀에게 밥을 주지 않고 무척 배를 골렸다고 한다. 그러는 나날이 계속되자 소녀는 마침내 피골이 상접해지더니 그만 영양실조에 걸려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초겨울 날 방문에 한지를 바르고 남은 풀죽이 조금 담긴 바가지가 마침 소녀의 눈에 띄었다. 몹시 배가 고팠든 소녀는 그것이라도 먹어보려고 힘겹게 기어가 손에 막 잡는 순간 이를 본 계모가 잽싸게 달려들어 이를 빼앗아 그만 개(犬)에 부어주고 말았다.

그날 이후 계모의 꾸중과 매질은 더욱 심해져 이를 견디다 못한 소녀는 얼마 못 가 그만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이에 계모의 모진 학대로 원통하게 죽은 소녀의 혼(魂)이 풀꾹새로 환생하여 풀꾹풀꾹 개개... 풀꾹풀꾹 개개... 하고 저렇게도 슬피 운다 는 서글픈 말이었다.

어디 이런 일이 옛날에만 있었겠는가! 지성(知性)이 넘치는 문명사회인 지금도 자식을 학대하는 계모는 끊이질 않는 것 같다. 얼마 전 전처의 자식을 매질로 학대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 어린애의 명의로 보험까지 들고는 그 아이를 아파트 계단에 밀어 끝내 숨지게 한 비정의 계모도 있었다. 그 계모는 전처의 자식을 사고사로 만들어 보험금을 타 내려 한 악독한 여인이 아니었던가.

또 얼마 전에는 자기 친부모를 살해하고는 증거를 인멸키 위해 시신을 토막 내 유기(遺棄)한 명문대학을 나왔다는 금수보다 더 못한 머리 좋은 지식인도 있었다. 요즘 고학력자들이 왜 이런지 모를 일이다.

그러고 보면 인성(人性)은 지식에 비례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오히려 인성을 갖추지 못한 자가 지식을 갖게 되면 더 악랄(惡辣)한 수법으로 나쁜 짓을 많이 하는 것 아닌지?

한둘 낳아 잘 키운다는 가족제도가 자기 아들 귀한 줄만 알고 무엇이든 들어주면서 그저 공부만 잘하면 된다고 여기는 우리 부모들의 의식과 생활 태도에서 문제를 찾아야 할 것 아닌가 한다.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인성과 지식을 고루 갖출 수 있는 교육 환경을 만들어 가야 한다.

우리의 가치관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충(忠) 효(孝) 인(仁)의 덕목인 윤리 도덕을 가정· 학교 그리고 사회에서 보다 높은 관심을 갖고 다시 열심히 가르쳐야만 하겠다.

좋은 인성의 바탕 위에 지식이 차곡차곡 쌓여 갈 때 밝고 평온한 사회가 꽃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지식(知識) 보다는 인성(人性)이 더 앞서야 한다. 그것은 인성은 주춧돌인데 지식은 기둥이고 상량(上梁)이고 서까래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춧돌이 붕괴되면 제아무리 튼튼하게 지은 집도 무너지고 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주> 풀꾹새; 뻐꾹새의 방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