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광장 / 아름다운 길
인문학광장 / 아름다운 길
  • 임 만 규 주)동화출판사 대표이사, 시인
  • 승인 2024.02.08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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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만 규 주)동화출판사 대표이사, 시인
임 만 규 주)동화출판사 대표이사시인
임 만 규 주)동화출판사 대표이사
시인

[시정일보]기상예보를 보고 이른 점심식사를 마친 후 아내와 길을 나섰다. 본격적인 여름휴가철이 되기 전 편한 여행을 하기 위해서다. 목적지는 남해안 통영으로 45년 전 우리부부가 신혼여행을 갔던 곳이다.

당시의 충무시가 통영군과 통합되어 이젠 통영시가 되었다. 신혼여행은 부산과 충무를 거쳐 경주까지 여행했는데, 부산과 경주는 여러 번 다녀왔지만 통영시는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었다. 아내는 ’한산 섬‘과 그 앞 바다가 가끔 생각나는지 어떻게 변했을까 늘 궁금해 했다. 아니 가보고 싶어 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 대전을 막 지나서 우측의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차량통행이 적어 도로가 한적하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음악을 켜고 아내와 말없이 한손을 잡고 달린다. 생텍쥐페리의 ‘사랑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보는 것’이란 말처럼 오늘 우리도 같은 방향을 보고 달리고 있다.

반세기 가까운 긴 세월을 지나온 부부의 수많은 사연들, 자식을 키워온 수고와 보람, 약해져만 가는 심신에 대한 회심, 그 파노라마가 이제는 용광로로 들어가 용해되고 정제되어 하나가 된다. 한세월 잘 살아왔다고, 감사하다고, 무언의 손길에 격려 그리고 위로가 오간다.

출발할 때는 먼 길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지난 45년의 세월을 잠시 잊고는 가슴 설레는 신혼부부로 돌아와 충무 앞 바다와 조우한다. 진즉 와볼 수도 있었으련만 왜 이제야 마음을 낸 것인지. 아내에게 미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케이블카에 탑승해 정상까지 오르니 통영시와 한려수도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망원경으로 한산 섬을 바라보니 불현듯 당시의 추억이 떠오른다. 우리 둘만을 태우고 섬에 상륙해 곳곳을 안내하고 설명해주었던 그 멋쟁이 선장아저씨, 외지에 나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그를 떠올리며 아직 살아있을지, 궁금해 했다.

신혼부부가 이렇게 긴 시간을 돌아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돌아왔는데, 한산 섬은 전혀 변함이 없어 보인다. 눈앞에 펼쳐진 바다와 섬, 그 정경이 새삼 아름답다. 저녁에는 파도가 돌을 굴리는 한가한 소리를 박자 삼아가며 호텔 야외 커피숍에서 밤 깊도록 지나온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분위기 탓인지 힘들고 어두웠을 때 보다는 즐겁고 행복했었던 이야기가 꽃을 피웠다.

아침 일찍 창문을 열어보니 바다에 비가 내린다. 섬들도 희미하게 멀리 앉아있다. 비가오니 배를 타고 섬에 가는 일은 포기해야할 것만 같다. 할 수없이 일정을 바꾸기로 했다.

남해의 독일마을을 가보자는 아내의 말을 듣고 지도를 살펴보니 그리 멀어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아내가 그곳에 가보고 싶어 하는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알 수가 있다. 독일에 간호사로 가 그곳에서 결혼하고 정착한 후배 ‘한분희’가 생각나서 그런 것을 말이다.

3개 섬을 5개의 연륙교를 통과해 달린다. 옅은 해무 속에 이슬비가 내리는 길이다. 순간 길가에 세워진 ‘아름다운 길’이라는 푯말이 눈에 들어왔다 사라진다. 기대감으로 정겨운 농가와 어촌 마을을 지난다.

독일마을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을 따라 위치해있다. 이국적인 독일식 집들의 길을 따라 오르니 안내소와 주차장이 나타난다. 우산을 쓰고 안내인의 말대로 언덕 위 기념관에 먼저 들려 입장했다.

지하전시장에는 1960년 대 서독에 파견되었던 광부와 간호사들의 애환이 담긴 사진과 기록이 전시되어있다. 교포들이 전통독일식 건물을 건축하고 축제도 열어가며 생활해가는 이야기들도 소개해주고 있다.

늦은 아침 식사를 하며 ‘한분희’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1993년도에 독일을 여행할 때, 프랑크푸르트에서 아내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를 받은 그녀가 놀랍게도 이른 아침에 호텔 뷔페식당에 찾아왔다. 독일인 남편과 수줍음을 타는 세 살의 사내아이를 데리고 왔다. 알려준 호텔이름이 프랑크푸르트에는 여러 곳이라 찾아 다녔다며 새벽에 600km를 달려왔단다.

놀라는 우리에게 아우토반에는 속도제한이 없어 3시간 걸렸다며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한다. 나는 결혼 전 그녀를 한 번 본 적이 있었는데 기억은 잘 나지 않았다. 귀국 후 전화에서 그녀는 우리와 좀 더 이야기를 하고 싶어 계속 따라오다가 그만 버스를 놓쳤다고 말했다. 외로움 때문에 결혼했다는 그녀가 착한 남편을 만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남편은 여러 차례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한국을 방문했다. 초등학생인 아들에게는 내가 출판한 피아노레슨전집을 선물했었다. 그 소년은 이제 의사가 되어 하이델베르크 의대연구원으로 근무한단다. 안타까운 소식은 그녀가 몇 년 전 암 수술을 하고 투병중이라 했는데, 지금은 다행히 건강을 많이 회복했다고 한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해무가 걷히면서 빨간 지붕과 멋진 창문의 이국적인 집들, 독일마을의 전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눈앞에 멋지게 펼쳐진다. 정성으로 잘 가꿔놓은 정원의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다시 길을 달린다.

소박하게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손잡고 걷고 걸어 반세기 지나온 길

노을에 걸터앉아서

바라보는 시간들.

사랑과 기쁜 일은 가슴에 쌓아놓고

눈물과 아픔들은 물에다 흘려가며

우리는 마주 보지 않고

같은 길을 걸었네.

『시조/아름다운 길』

길은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가는 경우도 있지만 또 내가 만들며 갈 때도 있다. 가끔은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가고 싶을 때도 있다. 그것은 일탈이라서 두려울 수도 있지만 자유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터이다. 어차피 인생의 방향은 모두 같다.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가 거부하지 못하고 가는 길, 그 길의 여정이 조금 바뀌었다고 뭐 그리 마음을 쓸 일이겠는가.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길이라면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길가의 ‘아름다운 길’ 푯말이 아침보다 더욱 선명하다. 빨간 다리를 건너 바닷길을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