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광장 / 감사하고 기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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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 무 성 전 대통령민정비서실 행정관, 수필가
  • 승인 2024.02.22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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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무 성 전 대통령민정비서실 행정관, 수필가

 

임 무 성 전 대통령민정비서실 행정관, 수필가
임 무 성 전 대통령민정비서실 행정관
수필가

[시정일보]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학교에서 가훈(家訓)을 써 오란다며 우리 집 가훈을 물은 적이 있었다. 성실·근면·노력이라든가 창의·정직 같은 가훈 감은 이미 학교 교훈이나 급훈으로 칠판 위에 걸려 있고,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도 옛날이발소에서 실컷 본 것들이라 쓰기가 민망했다. 아이들에게 써줘서 보내긴 했는데 무엇이라고 써줬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얼마 전에 성깔깨나 있는 후배와 만난 자리에서 가훈 얘기가 나왔다. 삼 남매를 둔 그는 자신의 성질이 급하고 고약해, 자기도 고칠 겸해서 가훈을 화내지 말자로 정했다고 했다. 그리곤 서예가에게 부탁해 쓴 가훈을 액자에 넣어 잘 보이는 거실 벽에 걸어놓았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가훈은 좀 격조가 있어야 하는데 그건 가훈 치고는 좀 가볍지 않으냐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허울 좋은 구호에만 그치는 가훈이 아니고 지극히 실용적인 가훈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가족이 모두 화를 내지 않는 가정이라면 구태여 가화만사성을 들먹일 필요도 없지 않은가. 또 화()로 인한 질병도 생기지 않을 것이고.

사람이 화를 내면 수십만 개의 뇌세포가 파괴된다고 한다. 짜증도 사람의 체질을 산성으로 만든다고 하는데, 산성은 만병의 원인이라고도 한다. 요즘 늘어나는 정신질환이나 치매도 그래서일까.

베트남 출신 명상가이자 평화운동가인 틱낫한(Thich Nhat Hanh, 1926~2022) 스님은 그의 저서 에서 이렇게 역설했다.

화를 품고 사는 것은 마음속에 독을 품고 사는 것과 같다. 닭이 최신 시설을 갖춘 대규모 농장에서 걸을 수도 없고, 뛸 수도 없고, 늘 비좁은 우리에 갇혀 주는 모이만 먹고 자란다. 닭이 알을 더 많이 낳게 하기 위해서 농부는 인공적으로 밤과 낮을 만들어낸다.

조명등을 이용해서 낮을 짧게 만들고 밤을 길게 만들면 닭은 그새 24시간이 지난 것으로 믿고 또다시 알을 낳는다. 그런 악순환을 반복하는 사이 닭은 결국 엄청난 화와 좌절의 고통을 안게 된다. 그 계란을 먹을 때 우리는 그 화와 좌절을 먹는 셈이 된다. ……(중략)…… 우리는 화가 난 암소에게서 짠 우유를 마셔서는 안 된다.

그는 화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마음의 평화를 얻는 지혜가 필요하다며, 심지어 화가 들어있는 채소를 먹어서도 안 된다고 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예전에 없던 AI(조류인플루엔자)나 구제역이라는 병도 그래서 생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도 화가 잔뜩 쌓인 소나 돼지, 닭고기를 먹다 보니 스트레스가 쌓여 예전에 없던 병들이 생겨나는 게 아닐는지.

옛날 백정은 소를 잡을 때 끌려가지 않으려고 울부짖는 소를 억지로 끌고 가서 마구잡이로 잡지 않았다고 한다. 소를 잡기 전에 백정이 소에게 물을 뿌려 목욕을 시키면서 소의 귀에 대고 조용히 사정을 말하면, 소도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였다는 얘기가 있다.

물론 소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려고 백정은 정신을 가다듬어 단번에 처치했다는데, 어쩌면 인정사정없을 것 같은 백정이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깊었던 것 같다.

백정은 상투를 틀지 못하고 비녀를 꽂지 못하며, 부모가 죽어도 상여를 쓸 수 없고 상복을 입지 못하는 등 온갖 천대와 멸시를 받았다. 그렇지만 화를 품고 살생을 하지 않았으며, 짐승에게도 화가 쌓이지 않게 자연의 순리를 따르게 했다니, 그들이 참 자연인이 아니었을까.

나는 아직도 똑 부러지게 가훈을 짓지 않고 있다. 짓고 싶은 가훈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우리 집안에는 재미있는 가훈 비슷한 게 하나 있긴 하다. 우리 7남매의 직계 가족이 모두 모이면 오십 명이나 된다. 가족 행사가 있어 다 함께 술이든 음료수든 건배를 할 때는 구호 끄트머리에 꼭 후렴처럼 밀어붙여!”라고 소리를 지른다.

자식들이 부모 세대를 뛰어넘어 좀 더 패기 있게 비상하라는 주문이다. 가을 단풍으로 물든 강화도에서 열린 가족 야유회에서도 외치고, 올 추석 차례를 모신 후에도 소리 높여 외쳤다.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밀어붙여!”

몇 년 전 김난도 교수의 저서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었다. 요즘 청춘들은 우리 세대보다는 세상살이가 훨씬 더 좋아진 줄 알았는데, 세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 오죽했으면 아픈 세대라고 할까. 청년 일자리, 결혼, 육아 같은 문제도 녹록하지 않다.

정부의 온갖 장밋빛 정책들은 공염불 같고 남의 다리 긁는 것 같다. 그건 그렇다 하더라도 청춘은 청춘 아닌가? 그러기에 우리 아버지들은 너희만 아프냐? 우리도 아프다라며 자식들에게 용기와 힘을 실어주려고 술잔을 높이 들고 밀어붙여를 외쳐대는 것이다.

우리 나주임씨 대종중의 종훈(宗訓)은 청고근졸(淸高謹拙)이다. ‘심지는 청백하고 고상하게 하며 처신은 삼가고 겸손하게 하라.’ 훌륭한 종훈이지만, 아이들에게는 좀 어려운 글귀이다. 나는 요즘 가족 모임에서 감사할 줄 알면 행복하다, 기뻐할 줄 알면 행복하다.

늘 감사하고 기뻐하라라는 말을 자주 한다. 지극히 평범한 말이지만 이 이상 복 받을 말이 어디 있겠는가. 감사할 줄 모르고 기뻐할 줄 모르며 매사 불평불만만 가득한 사람만큼 불행한 사람은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