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서울역·숭례문이 돌아온다
광화문·서울역·숭례문이 돌아온다
  • 백인숙 기자
  • 승인 2010.08.26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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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역사도시 조성 문화복원사업에 심혈

▲ ▲2010년 8월15일 복원 공개된 광화문 모습일제에 의해 경복궁의 중심축과 5.6도 틀어지고 후면으로 14.5m 물러나 자리했던 광화문이 지난 8월15일 3년8개월간의 복원공사를 거쳐 기백에 찬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 84년만에 제 모습을 찾은 광화문을 보기 위해 16만여 명의 시민들이 광화문을 방문했다.
 

서울시와 문화재청, 문화체육관광부가 나서 서울역사도시 조성을 목적으로 ‘서울문화복원’에 심혈을 쏟고 있다.
그 첫 번째 복원사업이 광화문으로 현판 제막식과 함께 지난 15일 그 위풍당당한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 많은 시민들은 새롭게 복원된 광화문을 보기위해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 가족과 또는 친구와 함께 기대 섞인 얼굴로 경복궁을 둘러봤다.
내년 3월에는 우리민족과 함께 애환을 함께 해온 구 서울역사(사적 제284호)도 복원된다. 단순한 기차역으로서만의 의미가 아닌 우리의 추억이 서려있는 서울역사가 완공되면 복합문화공간으로서 새로운 기능을 할 것으로 모두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보물 1호인 숭례문도 오는 2012년 복구된다. 또 다른 이름 남대문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숭례문이 복원되면 세종로와 광화문 일대의 서울역사도시의 밑그림이 완성되며 우리의 자산인 문화유산의 가치도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자리 찾은 ‘광화문’

광화문은 경복궁의 얼굴이자 정문으로서 수도 서울의 상징이다. 3년8개월의 복원 공사를 마치고 15일 일반인에게 공개,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 광화문은 예전과 같지는 않지만 최대한 옛 사진과 자료를 이용, 위치를 바로잡아 복원했다.

광화문과 같은 역사적 건축물을 복원할 때는 지켜야 할 원칙이 몇 가지 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복원이 확실한 ‘증거’에 의해야 한다는 점이다. 담당자의 추측이나 상상에 의해 복원이 진행되면 원래 건물이 왜곡될 수 있기 때문에 국제기구도 이런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관계자들에 의하면 광화문 복원에 필요한 증거는 충분한 편으로 일제강점기의 각종 사진자료와 당시 실측한 도면들이 존재했고 또 조선 후기 경복궁의 궁궐 배치도인 북궐도형도 남아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각종 건물의 위치가 비교적 상세히 묘사돼 있어 건물의 주칸, 공포형식 같은 기본적인 사항도 기술돼 있어 도움이 됐다.
그러나 이런 간접적인 자료보다 직접적인 자료가 필요하다. 따라서 실제 건물이 위치했던 곳의 발굴조사도 병행됐다.

발굴을 통해 각종 자료를 검증할 수 있었고, 이런 자료들을 토대로 설계도 진행할 수 있었다. 세부적인 건축양식은 경복궁을 비롯, 궁궐에 남아 있는 동시대의 비슷한 유형의 건물들을 참고했다.
이런 자료에도 불구하고 세부 설계에서 증거가 부족해 설계자를 곤란케 했던 것이 바로 ‘현판’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현판은 1960년대에 복원할 때 박정희 대통령이 쓴 한글 현판으로 이번에 한자로 바뀌며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복원팀은 현판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부족했기 때문에 우선 일본 동경대에 남아 있는 광화문 사진을 토대로 복원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유리건판 광화문 사진에 남아 있는 이미지는 너무 작고 주변 부위가 선명치 않아 그대로 활용하기 어려웠다. 여기에 컴퓨터영상처리 기법인 디지털프로세싱을 이용해 글자 형태를 추적하자 복원 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번에 선보인 광화문 현판은 고종 당시 관리였던 임태형 이라는 사람이 쓴 것을 복원한 것이다.

광화문은 조선 태조 4년(1395년)에 창건됐지만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면서 함께 훼손됐다. 이후 고종 1년(1864년)에 이르러서야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그런데 대원군이 중건한 광화문은 일제에 의한 의도적 훼손과 한국전쟁 등으로 여러 차례 수난을 겪으면서 원래 모습을 잃게 된다. 대표적인 사건은 일제강점기인 1927년 조선총독부 건물이 완공되면서 시작됐다.

당시 광화문은 총독부 건물의 전면을 막고 있다는 이유로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조선총독부 건물이 경복궁의 중요 건물인 근정전의 축과 틀어지게 배치됐다는 사실이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당시 남산에 있던 일본 신사를 바라보게 한다는 게 그 이유였는데 일제는 조선조 정궁의 기본 축을 변형시키고 문을 옮겨서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고자 했던 것이다.

건춘문 북쪽에 덩그러니 남겨진 광화문은 한국전쟁 중에 하부의 석조 기단을 제외한 상부의 목조건물마저 소실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1968년에 기단은 그대로 사용하고 상부의 건물은 철근콘크리트로 재현했지만 전면에 도로가 개설돼 일제에 의해 왜곡된 광화문의 배치 축과 위치는 바로잡지 못했다. 재료도 철근콘크리트로 복원하게 돼 일제에 의한 정체성 왜곡이 그대로 지속됐다.

결과적으로 광화문은 경복궁의 중심축과 5.6도 틀어지고 후면으로 14.5m 물러나 자리하게 됐던 것이다.
이렇게 원형을 잃어버린 광화문을 복원하자는 의견이 모아져 드디어 2006년부터 광화문을 복원하기 위한 철거 작업이 시작됐다.

서울역, 시민 문화공간으로

▲ ▲오는 2011년 3월 완공예정인 구 서울역사 조감도.사적 제284호로 지정된 구 서울역사는 팔도강산 모든 이들에게 고향역 같이 정든 서울의 관문이다. 오는 2011년 3월에 완공 예정인 서울역은 신 서울역사 등장으로 뒷켠으로 물러나 있다 2006년 문화체육관광부 주관으로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갔다.
우리민족과 함께 해오며 애환과 추억이 어린 서울역사. 사적 제284호인 옛 서울역사(驛舍)가 지난 100년의 흔적이 담긴 사진들이 붙어 있는 가림막 뒤에서 무한 변신 중에 있다.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인 서울역사 복원공사는 지난해 7월 시작됐다. 공정률 53%에 총 사업비 233억원을 들여 내년 3월 완공 예정이다. 1925년 준공 시점을 기준으로 상·중·하로 나눠 실별로 복원되는 서울역사는 건축물 내·외부는 크게 변형하지 않는다. 최대한 기본 모습을 살려내 문화공간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건물의 안전과 구조상의 문제점은 보수·보강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다.

우선 1층에 있는 1·2등 대합실과 귀빈실은 서울역의 역사를 통해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조망하는 상설전시관으로 운영된다. 또 건물 오른편 미군장병안내소(RTO)로 쓰던 공간은 상설공연장으로 활용된다. 1층 3등 대합실과 2층은 전시와 공연은 물론 세미나와 회의까지 열 수 있는 다목적 공간이 된다. 특히 국군장병 안내소로 사용하던 공간에는 노천카페가 들어선다. 중앙홀과 광장은 특별히 용도를 두지 않는다. 상황에 맞게 전시와 공연 등의 장소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장기적으로는 옛 서울역사를 포함한 주변 공간을 한국의 랜드마크로 만들 방침이다. 문체부 관계자는 “추후 옛 서울역사 바로 뒤편에 있는 상업시설을 들어내고 그 공간을 광장으로 활용할 것”이라며 “2011년 인천공항철도 개통과 향후 유라시아철도 출발역 등을 고려 우리나라 대표 문화공간으로 운영해나가겠다”고 밝혔다.

보고싶다, 국보 1호 숭례문

▲ ▲오는 2012년 복원 예정인 국보1호 숭례문 모습1962년 국보1호로 지정된 ‘숭례문’은 오는 2012년까지 수습단계를 거쳐 설계단계, 복구공사단계 등 3단계로 나뉘어 복원된다. 숭례문은 문루해체 및 복구, 육측보수 및 좌우성벽 복원, 문루단청, 주변환경정비를 거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늘 보아오면서도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던 보물 1호 숭례문. 숭례문은 우리민족과 삶을 같이 했다고 할 만큼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지난 2008년 화재로 소실되며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1395년 조선 태조 때 창건돼 1398년 새 왕조의 대문으로 완성된 숭례문은 1447년 세종시대에 풍수지리설에 따라 제대를 높여 개축한 후 1479년 성종 때 대규모 보수공사를 거쳤다. 소실전의 모습은 1963년 중수한 것이다. 그 후로 잦은 개보수를 거쳤지만 기본 구조만은 계속 유지해 왔다.

숭례문은 서울에 현존하고 있는 목조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중앙부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낸 거대한 석축 기단 위에 앞면 5칸 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도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형태인 우진각 지붕으로 고려 말 조선전기의 건축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을 뿐 아니라 현존하는 한국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컸었다.

`숭례문’이라는 현판은 `지봉유설’의 기록에 따르면 양녕대군이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동대문과는 달리 방어의 목적보다는 도성의 주입구로서의 상징성이 강해 조선시대부터 국가의 대문으로 여겨져 왔으며 1962년 국보 1호로 지정됐다.

지난 2006년 3월, 100년 만에 개방돼 일반인의 홍예문 출입이 가능해졌지만 누각으로의 접근은 제한돼 왔었다. 그러다 2008년 2월 10일, 화재로 순식간에 600년 문화재는 폐허로 변해 버렸다.

숭례문은 오는 2012년까지 수습단계를 거쳐 설계단계, 복구공사단계 등 3단계로 나뉘어 복원된다. 숭례문은 문루해체 및 복구, 육측보수 및 좌우성벽 복원, 문루단청, 주변환경정비를 거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숭례문복구에는 우선 기존 부재를 최대한 사용, 역사적 건축물의 가치를 유지할 방침이다. 또 일제에 의해 훼철된 좌우측 성곽과 원지반을 복원시킨다. 이번 복구작업에는 중요무형문화재 등 최고 기량의 기술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또 학계 등 원로 전문가로 구성된 복구자문단도 복원에 참여했다. 예산과 기술지원 공사시행은 문화재청이 담당하고 있다.

광복65주년 8월15일 광화문 열리던 날

서울은 지난 600년간 조선왕조의 수도로서 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소중한 공간이다.
특히 세종로와 광화문, 남대문을 돌아 서울역에 이르는 일대는 우리 역사에서 아주 각별한 의미가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서울을 시와 문화재청, 문화체육관광부가 나서 역사·문화적으로 복원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그 첫 번째 작업으로 광복절에 광화문이 복원, 공개됐다. 이날 84년 만에 제 모습을 찾은 광화문을 보기 위해 16만여 명의 시민이 운집했고 무료로 개방된 광화문을 지나 근정전까지 시민들은 걸으며 위풍당당한 경복궁의 제 모습에 환호했다.

관악구 신림동에서 가족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는 신동진(42) 씨는 “일제에 의해 본 모습을 잃은 광화문이 복원돼 너무 기쁘다”며 “아이들에게 역사의 현장을 보여주고 싶어 이곳에 오게 됐다”고 말했다.
또 중구에 거주하는 이은미(47) 씨는 “정부에서 열심히 복원작업은 했지만 광화문 크기도 작은 것 같고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된 것 같지 않다”며 “이왕 공사를 시작했으면 전체 크기라든가 담장 높이 등 원형그대로 복원됐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표현했다.

이에 문화재청 김원기 궁능문화 과장은 “경복궁 제모습 찾기는 이제 시작이다. 최대한 원래모습으로 복원하려고 노력했지만 2차 복원공사가 끝나도 조선시대의 똑같은 모습으로의 복원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제 내년 3월이면 서울역사가 완공되고 2012년엔 화마로 제 모습을 잃은 숭례문이 복원된다. 2004년 이래 기능을 상실한 채 뒷켠으로 물러나 있었던 서울역사가 2년 만에 변화를 위해 새로운 가치를 찾아 나섰고 국민들이 사랑하는 숭례문도 새로운 소명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다.

작은 나라에 소규모 민족인 대한민국. 그러나 우리가 가진 문화유산과 역사는 세계 어느 나라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그 가치가 크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문화유산이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도 그것의 과거모습을 모르거나 제대로 복원하지 못한다면 그 가치는 줄어들 수 밖에 없다.
도편사의 한 관계자는 “국민들이 복원작업을 새로운 역사 그자체로 봐줘야 한다”고 강조한 뒤 “조선시대와 근·현대사의 흥망성쇠를 같이해온 광화문, 남대문, 서울역사 복원으로 국민이 사랑하는 서울, 세계인이 즐겨 찾는 서울로 거듭나야 한다”고 역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