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버리지 리포트
베버리지 리포트
  • 방용식
  • 승인 2012.01.05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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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일보]1942년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사회개혁가인 윌리엄 베버리지(William Beveridge, 1879~1963)는 무상의료서비스와 실업급여제공, 자녀수에 따른 최저생계비 지원 등을 담은 보고서를 발표했다. 2차 세계대전으로 궁핍에 빠진 영국국민을 구제하기 위한 이 보고서는 정식명칭이 ‘사회보험과 관련사업(Social Insurance and Allied Services)이었지만, 작성자인 베버리지의 이름을 따 ‘베버리지 보고서’로 알려졌다.

보고서의 내용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을 담았고, 1945년 집권한 노동당에 의해 본격적으로 정책이 추진됐다. 전 국민이 사회보장의 혜택을 받으며 여기에 드는 비용은 국가·고용주·노동자가 분담할 것을 원칙으로 한 이 보고서는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the cradle to the grave)’라며 상징화됐다. 이후 세계 각국에서는 베버리지 보고서를 복지국가를 향한 바이블로 받아들였다. 김대중 정부 시절 도입된 기초생활보장수급제의 개념도 베버리지 보고서에서 차용한 것이다.

그런데 요즘 이 베버리지 보고서가 흔들리고 있다. 그것도 보고서를 입안하고, 복지정책의 뿌리로 삼았던 노동당 소속의 42살의 촉망받는 정치인이 장본인이다. 노동당 예비내각(Shadow Cabinet)의 노동연금부 장관인 리엄 번(Byrne)은 ‘복지수혜자의 책임성과 자기부담 원칙강화’를 내세우며, 최근 영국일간 <가디언>지에 “만약 윌리엄 베버리지가 살아 있다면 그도 현재의 복지제도를 개혁하기를 원했을 것이다”며 기고해 논란에 불을 붙였다. 영국의 사회보장제도는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집권한 보수당의 대처(Margaret Hilda Thatcher) 총리에서 수정되기도 했지만 보수당에 맞서는 노동당에서 베버리지 보고서의 개혁을 주장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분명히 국민에 대한 국가의 의무를 규정한 ‘선진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발표된 지 70년이 지나면서 사회·경제적 환경이 변했다. 변화를 모른 체 하고 나무둥치만 붙들고 있거나, 칼 떨어진 자리를 배에 표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영국의 베버리지 보고서 개혁 움직임을 보면서 자기 정당의 중요한 원칙이라도 국가와 국민전체를 위해 고치려는 영국의 정치인과 정치문화가 일견 부럽다. 그러나 이런 개혁이 유로지역을 휩쓰는 경기불안 때문이라는 생각에는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