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장 칼럼/노숙인 자활 정책 사회통합을 위해 필요하다
단체장 칼럼/노숙인 자활 정책 사회통합을 위해 필요하다
  • 시정일보
  • 승인 2012.07.05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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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길형 영등포구청장

최근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말 구매력(PPP)기준으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었다고 보도했다. 청년 실업, 양극화 등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점들도 지적하고 있지만, 전체적 어조는 몇 년간 선진국들이 금융위기와 재정위기로 휘청대는 동안 한국은 그래도 선방했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우리나라에서 ‘배고픔’은 아득한 옛이야기가 된 듯하다.

애석하게도 ‘절대적 빈곤’에 허덕이는 아프리카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엔 빈곤의 악순환에 빠져 삶이 한겨울만큼 추운 이들이 많다. 이는 정부와 정치인들이 서민의 삶과 동떨어진 경제 정책만 펼쳐서일 수도 있다. 혹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약자에 대한 무관심과 부도덕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다. 요즘 나의 최대 고민은 ‘불행의 늪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줄 방도는 없을까’이다.

얼마 전 가슴 뭉클한 기사를 봤다. ‘노숙인 저축왕’과 관련된 기사다. 보호시설에서 생활하는 노숙인들을 대상으로 소득 대비 저축률이 가장 높은 70명을 저축왕으로 선발했다는 내용이다. 수년간 얇디얇은 박스 하나에 몸을 맡긴 채 잠을 청하고, 자살을 기도했던 사람들이 희망을 품게 된 것이다. 문득 나의 뇌리엔 ‘기적’이라는 말과 동시에 ‘방치’라는 말이 스쳤다.

‘깨진 유리창 이론’이란 게 있다.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하면 그 지점을 중심으로 범죄가 확산된다는 이론이다. 역으로 뉴욕의 지하철 범죄가 심각할 때 지하철에 그려진 낙서를 지웠더니 범죄율이 75%나 줄었다는 사례도 있다. ‘깨진 유리’는 사회적 문제를 외면하는 우리 내면의 무관심을 상징한다.

사회에 부적응한 이들을 ‘깨진 유리’처럼 모른 체한다면 이른바 ‘묻지 마 범죄’ 등 사회 문제는 증가할 것은 자명하다. 우리가 사회적 약자를 적극적으로 끌어안아야 하는 배경이다.

‘보편적 복지’와 같은 막연한 정치 철학을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성장과 효율성의 가치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그에 대응하는 인간주의적 가치를 정립하지 않고서는 복지국가로의 질적 전환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싶다.

소외 계층의 손을 잡아주는 것, 사회 구성원으로서 능력을 다시 펼칠 수 있도록 재교육을 돕는 것 등이 ‘첫걸음’일 터이다. 노숙인들에게 임시 주거비를 지원하거나 자전거 수리 기술, 제빵 기술 등을 가르치는 자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정부와 자치단체의 ‘지원 사격’도 중요하다. 실제로 임시주거비지원사업으로 월 20만원씩 두 달간 주거비 지원을 받은 어떤 김씨는 ‘고작 두달’의 지원이 자신의 삶에 엄청난 결과를 가져다준다고 말한 걸 인터넷을 통해 봤다. 주거지가 명확해지니 주민등록 재발급이 가능해지고, 주민등록증이 생기니 일용직 노동 등 일거리를 찾아 나설 수 있게 됐다는 게 그의 답변이었다. 재기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고 물질적인 지원을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번 강조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시민 없는 복지’ 단계에 머물고, 수혜자보다 공무원이 주체인 정책 집행 현실을 비꼬기엔, 우리에겐 시간적 여유가 없다. 공용 화장실이나 공원 귀퉁이에서 생활하는 그들에게는 그렇게 오랫동안 버틸 삶의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소외된 이웃을 위해 뭔가 하고 싶다는 마음을 한 번쯤 품었을 사람들은 지금 당장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노숙인 등 사회적 약자들이 우리 사회의 ‘균열의 불씨’가 되느냐, ‘희망의 씨앗’이 되느냐는 우리 가슴에 있는 ‘깨진 유리’를 방치하느냐, 제거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제 정부나 자치단체, 그리고 시민사회가 노숙자문제를 어떻게 풀어 갈 것인지 깊은 고민을 할 때가 되었다. 먹는 문제를 넘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