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앞/공직을 맡는 자세
시청앞/공직을 맡는 자세
  • 방용식
  • 승인 2013.03.07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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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의 개혁 아이콘이 될 뻔했던 김종훈 씨가 미국으로 돌아갔다. 새 정부 5년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다는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에 내정된 지 불과 1주일 만이다. 김 씨는 장관에 내정되면서 “조국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 씨는 언론의 ‘지나친’ 까발리기, 야당의 정부조직법 개정 미합의 등을 이유로 대한민국을 떠났다. 그러면서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겠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조국에 헌신하겠다는 강조는 최고지도자의 총애를 받는 자리를 위한 ‘레토릭(rhetoric)’에 불과하지 않았나 의심스럽다. 헌신(獻身)이라는 단어의 무게 때문이다.

헌(獻)은 제사(祭祀)에서 희생으로 바치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그가 나이 아흔에 낳은 하나뿐인 아들, 이삭(Isaac)을 신의 명령에 따라 제물로 바침으로써 신의 믿음을 얻었다. 고대는 물론 요즘에도 일부 폴리네시아 국가들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자신들에게 ‘가장 소중한’ 가축을 죽여 피를 바른다. 113년 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죽인 안중근 의사는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이라는 글을 남긴 뒤 사형을 당했다. 헌신은, 결국 자신을 죽이는 일이다. 독립운동을 하거나 신(神)이 가치의 준거였던 사회의 제사를 오늘날과 같은 물질문명사회에서 장관을 맡는 상황과 동일시하는 것은 불리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국가에서 공직을 맡는 사람들은, ‘헌신’ 근처에라도 가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것이 인간으로서 ‘절대적으로’ 누려야할 자유를 양도한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서양 민주주의의 틀을 만들었던 프랑스혁명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J. J. 루소는 ‘법의 지배’를 위해 인민의 자유양도를 주장했다. 조선 중기 관료학자인 잠곡 김육(1580~1658)은 “만물을 사랑해 사람을 구제하라(愛物濟人)”고 말했다. 애물제인은 소학(小學)의 구절로 ‘일명(一命)의 관원이 진실로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다(一命之士 苟存心於愛物 於人必有所濟)’는 내용이다. 김육의 친구인 자정 이유양은 논어(論語)의 ‘견현사제(見賢思齊: 어진 이를 보면 같이 되기를 생각하라)’를 공직생활의 자세로 삼았다.

국민들은 물질이 문화를 앞서는 요즘, 공직자에게 거창한 요구를 하지도 않는다. 고루하다며 폄훼하는 전통사회만도 못한 공직의식을 가진 고위공직자(또는 후보)가 있어 안쓰러울 뿐이다. 염치(廉恥)없고 무능한 자들이 통치하는 나라의 국민들은 간뇌도지(肝腦塗地)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