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의 독립운동가 誠齋 이동휘 선생(1873∼1935)
■ 4월의 독립운동가 誠齋 이동휘 선생(1873∼1935)
  • 시정일보
  • 승인 2005.04.07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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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후 구국계몽운동… 북간도 망명 독립운동 전개

성재 이동휘(李東輝) 선생이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국가보훈처는 일제의 침략에 맞서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에 헌신한 이동휘(1873∼1935) 선생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이동휘 선생은 상해임시정부시절 국무총리로서 대통령 이승만의 정치적 라이벌뿐 아니라 1920년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였으나 냉전과 분단 상황에서 과소평가됐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이동휘 선생은 1873년 함경남도 단천군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단천군수의 심부름꾼인 ‘통인(通人)’이었으나 군수의 패행을 참다못해 불화로를 군수에게 뒤엎고 상경, 사관양성소에 입학했다. 그 후 선생은 육군참위에 임관돼 승진을 거듭하다 강화도 진위대장이 됐지만 1904년 러일전쟁 후 일제의 조선침략이 가속화되자 1905년 군직을 사임한 후 강화도에 보창학교 등 사립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운동에 나섰다. 또 1907년에는 서북학회 임원으로, 한편으로는 비밀결사인 신민회 지도자로 국권회복 운동을 전개하다 1911년 ‘신민회 사건’으로 1년간 유배되는 고초를 겪었다.
선생은 유배에서 해제된 뒤 1913년 압록강을 건너 북간도로 망명, 한인자치기관인 간민회를 지도하고 1914년 만주와 러시아의 민족운동세력을 규합해 대한광복군 지도자로 독립전쟁계획을 지휘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가 일본의 동맹국이 되면서 러시아의 탄압이 심해지자 북간도로 옮겼고,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 소식을 듣고 연해주로 돌아가 10월 혁명 후 러시아 혁명세력과 연대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선생은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활동하면서 러시아에 특사를 파견, 자금지원약속을 얻어내며 무장투쟁노선을 채택하는 등 임시정부의 독립투쟁노선을 강화했다. 선생은 1921년 개혁을 요구하며 임정을 탈퇴한 대신 상해에서 고려공산당 창당을 비롯해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석, 한국의 독립운동을 요구하는 등 독립운동에 힘쓰다 1935년 1월31일 6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方鏞植 기자 argus@sijung.co.kr